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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

 조커, 조커시여. 베르고가 내민 사진을 받아들 때까지 분노를 식히지 못하고 있던 리쿠는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었다. 테이블 건너편부터 들려온 간절한 외침은 이제 더 이상 아무런

무게도 담지 못했다. 차갑고 독기 어린 미소가 도플라밍고의 입가에 번졌다.


조커, 그게 당신이 부르는 나의 이름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드라진 어깨선이 바르르 떨렸다. 리쿠는 강인한 남자였다. 강인한 만큼 정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선망하던 그 두 가지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대부시여. 이제 당신은 제 대부십니다. 그의 목소리엔 피가 섞여있었다. 벼랑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같았다. 점차 멀어지고 점차 작아지는, 그래서 점차 익숙해지는 종류의 목소리. 한이 섞이고 살갗이 함께 갈려 나왔지만 중량 없는 목소리론 누구도 무릎 꿇릴 수 없다. 대부라. 듣기 좋군. 도플라밍고는 웃었다.
 대부. 그것은 도플라밍고 대신 따라붙은 그의 이름이었다.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바라며 그의 이름을 부르짖고 그의 발밑에 엎드렸다. 도플라밍고는 그 불쾌한 감각을 싫어하지 않았다. 대부님, 목숨을 걸고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그러니 제 자식을, 제가 사랑하는 이들을 구원하소서. 습관처럼 아부하고 무릎을 꿇는 게 몸에 익어버린 가련한 사람들. 자리에 반듯하게 앉아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절대왕정 시대의 빅토리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신께 여왕의 구원을 기도했고, 그가 진창길을 밟아야 할 때 기꺼이 자신의 외투를 벗을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내가 대부가 되었다면, 자넨 충성을 맹세하겠지. 그럼 난 자네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켜주게 될 거고.


 그는 투명한 온더락잔을 들어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얌전히 서있던 베르고가 위스키를 조금 따라주었다. 입술을 적실 정도로 조금 들이켰다. 링크우드였다. 리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플라밍고는 무심하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단순한 지시를 알아들은 베르고는 같은 종류의 위스키를 따라 리쿠 앞으로 내밀었다.
 그럼 충성을 보여야지.
 리쿠가 입술을 악물고 고개를 치켜들어 떨리는 손으로 잔을 집어들었을 때 도플라밍고는 말했다. 증오 섞인 눈빛이 닿자 마주보며 웃었다. 잔을 천천히 흔들었다. 링크우드는 밝은 빛이었다.

 어떻게 보여줄 텐가?
 독기 어린 미소가 점차 번졌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도플라밍고를 노려보던 리쿠는 쥐어짜듯 말하며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드레스로자는 이제 당신의 것입니다. 도플라밍고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잔은 조금도 부딪힐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에서 움직였고 차가운 건배에선 어떠한 신뢰도, 정도 오가지 않았다. 리쿠의 손에 들린 온더락잔이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았다.
  나는 당신 밑에서 일을 배웠지. 이제 다음 세대가 드레스로자를 물려받을 때야. 도플라밍고는 모든 드레스로자 사원들의 프로필이 빼곡하게 기재된 파일을 베르고에게 내밀었다. 느린 속도로 잔을 들이키던 리쿠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건 태워버려.
모든 종류의 분노를 동시에 담고 있어서 곧 터질 것 같았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온더락잔이 낙하에 바닥에 떨어졌다. 리쿠는 변명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도플라밍고도 그 상황에 별다른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위스키를 두 병쯤 들이키면 그의 이름보다 더 오랜 시간 그를 쫓아다닌 뿌리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었건만 아무것도 없는 것을 선택한 사람. 무책임하고 몰가치한 사람. 황갈색으로 반짝이는 위스키가 잔에 가볍게 걸친 그의 입술을 타고 입으로 넘어가면 그의 혈관과 사고 한구석에 기생해 연명하는 아버지의 잔상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도플라밍고는 그 잔상이 두렵지 않았다.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가슴팍부터 질펀하게 뿜어져 나온 피가 요동치는 대동맥을 타고 넘어가 혈관에 알코올을 퍼날랐다. 술을 마시면, 도플라밍고 대신 그의 피와 권력에 숨어 살아온 수많은 망자들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리쿠는 도플라밍고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 거칠게 멀어지는 그의 발걸음은 목소리와 비슷한 효과를 자아냈다. 절대온도까지 내려간, 차갑고 딱딱한 사무실의 공기는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잔에 남아있던 묽은 액체를 단번에 쏟아 보낸 도플라밍고는 리쿠가 바닥에 내려놓은 드레스로자의 금빛 배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회장실의 어두운 조명을 반사한 매끄러운 표면이 반짝였다.
  모든 사람이 존경하던 초대 대부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차기 대부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도플라밍고는 온더락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자리에 있는 명패에 두꺼운 고딕체로 적힌 글씨는 먼 과거의 관념이 되어버렸다. 손끝으로 글자를 천천히 쓸었다. 전무이사 돈키호테 도플라밍고. 몇 년간 익숙하게 봐온 철자들이었다. 베르고는 문가로 걸어가 리쿠의 배지를 집어들었다. 이건 어떻게 할까요, 회장님. 베르고의 목소리는 도플라밍고의 행동만큼이나 차가웠다.
  가져와. 그리고 미호크한테 전해. 우리가, 내가 왕이 됐다고.
 베르고는 고분고분 다가와 도플라밍고의 손에 금색 배지를 떨어트렸다. 드레스로자 임원 전체에게 배분되는 똑같은 디자인의 배지가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그는 책상 한가운데에 리쿠의 배지를 올려놓았다. 베르고가 문을 닫는 순간 창문 밖으로 리쿠가 건물을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당신은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 가족들과 나머지 생애를 보내겠지. 풍족하고 귀족적인 생활을 포기하게 된 자식들은 불만이 많을 거야. 함께 회사를 운영한 아내는 모든 상황을 꿰차며 말없이 떠날 준비를 하겠지. 비참하지만, 아무도 죽지 않았어. 난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가족도, 방금까지는 당신을 존경하던 모든 사원들도. 그는 중얼거렸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손으로 죽여온 사람들의 숫자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마찬가지로 그는 오늘 하루 몇 걸음을 걸었는지, 또 숨을 얼마나 쉬었는지 기억하지 않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그리고 문득 그 생각이 떠올랐을 때 느껴지던 묘한 감각조차도 이제 기억 저편에 흐릿하게 존재할 뿐이었다.
  조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그 모토에 충실했다. 아무도 그에게서 도망치지 못했고 또 감히 그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개 반려와 자식을 둔 그들은 피붙이 혈육들의 육신을 건 도박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 비루하고 헌신적인 몸뚱이를 기꺼이 전대 대부의 발아래 던졌다. 멀쩡히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을 자식의 얼굴을 생각하며, 혹은 평범한 회사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을 반려를 생각하며 그들은 죽음을 불사했다. 그 상태에서 그들은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강했다. 조커는 그것을 그들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강인했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강인한 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철저히도 약점으로 작용했다. 조커는 그런 법칙이 마음에 들었다. 스스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을 엎드리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당신에게 드레스로자를 맡기고 러시아로 망명했었지. 그건 결코 유쾌한 삶이 아니었어. 도플라밍고는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는 창문 앞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라디에이터를 켜지 않는 추운 사무실이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드레스로자는 도플라밍고가 마땅히 물려받아야 할 자산은 아니었다. 단지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던, 그래서 그의 삶을 보다 편하게 만들어주었던 하나의 도구이자 장치였다. 그것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리쿠라는 남자의 손으로 들어갔을 때 도플라밍고는 별다른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춥고 낯선 러시아로 가야만 했다. 아버지는 그것을 회귀라고 불렀다. 아직도 거친 러시아 외곽에서 도플라밍고는 회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손끝에 만져지는 금색 배지의 감각은 선명했다. 차가운 공기에 동화되어 함께 차갑게 식어버린 온도가 느껴졌다. 배지를 집어 들어 손에서 몇 번 굴렸다. 지닌 것 이상의 중량으로 위장하지 못하는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도플라밍고는 몸을 돌려 책상 옆에 위치한 아담한 쓰레기통에 배지를 던져넣었다. 하릴없이 떨어져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의 중앙에 떨어지게 되자 둔탁한 소리를 내질렀다.
그는 이제 드레스로자의 회장 자리를 딛고 올라섰다. 더 높은 곳으로 가고자 하는 욕망은 없었다. 회장 자리와는 별개로 여겨지던 권력의 중심지는 도플라밍고의 자리를 넘지 못했고 그는 그 중심을 온건히 손에 잡을 수 있었다.
나는 죽음에서 출발했어. 천 번의 실패와 천 번의 성공을 거쳤어. 그리고 마침내 왕이 되었어. 대부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기꺼이 무릎을 꿇는 이들의 머리를 딛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적어도 도플라밍고에겐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질문이었다. 어디든 가지 못하겠는가. 가고자 하는 곳이라면. 정착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불가침 영역이 되어버린 대부의 자리란 그런 곳인데. 도플라밍고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겨울의 공기가 폐부를 아릿하게 달궜다. 서늘한 미소가 다시금 번졌다.

 

 

평소보다 훨씬 낮게 떠올라 빛난 겨울의 차가운 태양은 곧 도플라밍고의 대지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짙은 밤이 그의 살갗을 타고 내려왔다.춥지 않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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