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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높게 뜬 낮임에도 이상하리만큼 어두운 골목길, 그 곳은 아주 고요했다. 아니, 고요한 걸까? 만일 당신이 귀를 더 기울인다면, 총성과 비명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은은하게 퍼진 화약 냄새를 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장면들은, 그곳에서는 매우 일상적인 일이기에, 마치 평화롭고 평범한 뒷골목처럼 보일 것이다….

" 어라. "

그리고 그런 뒷골목에서 일상적인 총성도, 비명소리도 아닌 다른 소리가 들려온다. 사람의 목소리가, 조금 높은 톤의 목소리로 말끝의 음을 살짝 올려, 어조만 보면 마치 하나도 모르겠다는, 단지 의구심이 가득한, 그런 목소리가…. 그러나 그 목소리의 주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로 얼룩덜룩해진 붉은 색 더블브레스트 정장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으며 그 장갑을 낀 오른 손에는 총이 들려 있어 살벌한 분위기를 풍겼다. 달콤해 보이기까지 하는 연 갈색빛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올려 묶은 그는 검지 손가락을 입술 밑에 짚고 고개를 기울였다. 만일 그의 정장이 비린내가 나는 붉은 물에 부분부분 젖어있지 않았더라면, 그의 몸에서 화약 냄새가 풍기지 않았더라면, 그는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무구한 아가씨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그런 순진무구한 아가씨가 아니었고, 그러한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 아직도 안 죽었네? "

…그의 발치 즈음에서 붉은 것을 토하며 바르작거리는 사내가 있었다. 또각거리는 소리가 군데군데 정체모를 붉은 액체로 물든 돌바닥을 울렸다. 그의 구두가 닿는 곳마다 바닥 중 붉은 곳은 더욱 붉은 물이, 깨끗한 곳은 짙은 붉은 물이 들었다. 사내의 근육이 경직됐다. 명백한 긴장의 표시였다. 어찌 저런 순진한 얼굴로 사람을 쏴 죽인단 말인가! 피는 무슨, 손에 물도 묻히지 않을 것처럼 생겼지 않은가…. 아니, 외관은 어찌되어도 좋았다. 하지만 어찌 사람이 이럴 수 있다는 말인가. 자신의 동료들은 전부 그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그 것도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사내는 생각했다. 아아… 괜히 그런 큰 조직에 소속된 자가 아니었다. 저 얇은 팔 하며, 귀여운 외모하며, 밖에서의 평판하며… 얕봤던 것이 실수였다.

콰직, 적당히 굽이 있는 구두로 그가 사내의 머리통을 짓밟자 사내는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사내의 신음을 들은 그의 표정이 일순 돌변했다. 순진무구한 아가씨가 아닌, 악마와도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소리 높여 웃었다. 사내는 그 웃음소리에, 그의 살기에 온 몸에 오한이 들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바보 같은 것들! 사내의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웅웅 울리는 감각에 사내는 손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갔다. 그를 향한 사내의 분노이자 원망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내의 손등에 총을 쏴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건방지기는! 탕, 탕. 두어 번의 총질을 끝으로 사내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급소는 맞지 않았지만 출혈이 큰 탓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풍겨오는 옅은 담배연기와 다가오는 듯한 묵직한 구두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지는 것을 이후로 사내는 깊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푸딩양. "

금발에 뱅글거리는 눈썹을 가진 이가 피고 있던 담배를 신고 있는 검은 구두로 짓밟아 끄며 반가운 눈치로 맑게 웃으며 그, 푸딩을 불렀다. 푸딩은 부름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금발에 단정하고 깨끗한 정장, 그리고 그런 그의 맑은 웃음은 침울하고 붉게 얼룩진 거리에 비해 위화감이 들 정도였다. 푸딩은 퍽 당황한 눈치였다. 마치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 라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어라 말을 하려던 푸딩은 이내 자신의 발밑에 방금 막 숨이 끊어진 사내가 있음을 깨닫고 황급히 사내를 발로 차 뒤쪽으로 밀어버렸다. 푸딩은 심호흡을 서너 번하고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금발의 사람은 침착하게 푸딩이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친절하게도.

" 뭐야! 일하는데 방해라구, 상디! …씨. 대체 왜 여기에 있는거야 당신?! "

침착하게 입을 연 것을 치고는 꽤나 매몰찬 말투였으나, 끝에 가서는 수줍은 모습으로 상디를 부른다. 상디는 그에 상냥하게 웃으며, 지나가다가 목소리가 들리기에 들린 것이라며 태연한 모습으로 푸딩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해주겠다는 의미였다. 푸딩은 그에 여전히 수줍은 모습으로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으려고 하였으나, 순식간에 돌변해 그의 손을 쳐냈다. 뭐 하는 거야?! 불쾌하게!! 그리고 꺼내진 말은 푸딩의 본심과는 꽤 달랐다. 푸딩은 자신이 한 말이 그 자신마저도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상디는 그 말에도 상처받지 않은 듯, 매우 익숙한 듯 웃고는 옆으로 비켜 푸딩이 먼저 지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실없기는… 변명하기에는 용기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와는 친밀한 관계를 맺을 이유가 없으니. 그럼에도 푸딩은 솔직할 수 없는 자신을 원망하며 자신의 뒤에서 새로 담배에 불을 붙이기 시작한 상디와 함께 피로 얼룩덜룩해진 골목을 벗어났다. 푸딩의 발에 진득하게 따라오던 붉은 물이 골목길에 섬뜩한 발자국을 남겼고, 그 뒤를 따라오는 발자국이 붉은 물을 옅게 만들어 주었다.

 


 

푸딩과 상디는 결혼이 예정되어있는 정략 약혼 관계였다. 푸딩은 상디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지만, 상디는… 글쎄, 과연 어떨지. 상디는 모든 여성에게 친절했고, 마찬가지로 여성인 푸딩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푸딩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설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사랑에 빠졌으니까. 푸딩이 상디를 죽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적대세력이니까.
그래. 그게 푸딩이 상디를 죽여야 하는 이유였다. 단 하나의 이유. 상디의 세력은 푸딩의 조직을 우호세력으로 알고 있을 테지만, 푸딩의 보스가 상디의 세력을 괴멸시키려고 하니 적어도 푸딩의 입장에서는 적대세력임이 분명했다…. 그러니 반드시 죽여야만 했다. 그것이 푸딩의 임무니까. 평소와 비슷한 임무였다. 사람을 죽이는, 그런 단순한 임무. 하지만 푸딩은 그 임무를 성공할 수 있을 것만 같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다가?

달그락, 타닥, 탁. 잔과 잔 받침대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타자를 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푸딩은 아까하고 온 임무에 대한 보고서를 적고 있었다. 그리고 상디는 그 앞에서 여러 간식거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아마 푸딩이 보고서를 다 쓰면 함께 작은 티타임이라도 가질 생각인 듯했다. 으레 푸딩이 임무를 마치고 왔을 때와 같이. 푸딩은 잠시 상디가 따라준 찻잔의 차를 응시했다. 향이 좋았다. 붉은 색의 차에 푸딩의 얼굴이 반사되어 비추어졌다. 임무를 할 때 흔히 보이는 불쾌한 붉은 색과는 다르게 은은하고 고급스러운, 기분 좋은 붉은색이었다. 푸딩은 반사된 자기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 자기 자신과 눈을 맞추자 기분 좋은 붉은색이 돌변했다. 고급스러운 차에 비추어진 자신의 얼굴이 아닌 붉은 피에 절여진 자신과도 같았다. 내 본심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내 임무는 무엇이지? …어느새 푸딩은 타자를 치는 것을 멈추고 차에 비친 자신과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푸딩은 스스로에게 끝없이 물었다. 나는… 그러나 그런 푸딩의 마음을 모르는 상디가 의문스러운 투로 물었다.

" 푸딩양?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

" 아니, 아니야. 신경 쓰지 마! 그렇게 신경 써주면 괜히… 진짜연인 같으니까! "

푸딩은 갑작스러운 상디의 물음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대꾸해버렸다. 아차. 푸딩은 자신의 입을 다물었다. 상냥한 말에 이렇게나 모질게 답했는데도 상디는 무엇이 좋은 것인지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왜 저렇게 웃는 거야, 바보 같게..! 푸딩은 자꾸만 상디의 말과 행동에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푸딩이 임무를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분함과 그 자신에게 느껴지는 모멸감에 손을 꾹 말아 쥐자 상디가 푸딩의 부드럽게 손을 잡아 펴 주었다. 푸딩이 흠칫 몸을 떨었다. 아, 그래. 이런 잔잔한 설렘… 은은히 퍼지는 홍차의 향기에, 달콤한 디저트 냄새에, 사랑하는 사람… 그러나 푸딩은 그것들에 굴하지 않을 것이다. 푸딩은 끝내 자신의 임무를 완성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나는 빈스모크 상디를 죽인다.

" 손톱자국 생겨요. "

" …네 알 바 아니잖아. "

내버려 둬! 역정을 내는 듯한 투에 상디는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는 덧붙였다. 레이디의 고운 손에 상처가 나면 내 마음은 찢어지니까. 레이디. 레이디라고. 푸딩이 아니라 레이디였다. 푸딩 그 개인이 아니었다. 푸딩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확 정신이 들었다. 머릿속이 얼얼했다.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것만 같았다. 설렘은 사라지고 방에서는 홍차의 향이 아닌 매캐한 화약 냄새가 맴돌았다. 언뜻 피 비린내도 맡아지는 것 같았다. 아, 그래. 맞아. 그랬지. 그는 모든 여자에게 친절했었지. 내게만 친절한게 아니었지…. 그래, 그가 푸딩에게 친절한 건 전부 의무적인 친절일 것이다. 약혼자에게 주어지는 의무적인 친절. 레이디에게 주어지는 의무적인 친절. 마치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사실 푸딩도 원래는 상디에게 상냥했다. 그를 사랑하지 않았을 때에 푸딩은 가식적으로 행동했다. 푸딩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저놈들의 뒤통수를 치려면 신뢰를 받아야하고, 그러려면 어여쁘고 고분고분한 아가씨가 되는 편이 편했다. 그리고는 뒤통수에 총알을 박아주는 것으로, 그동안 착하고 어여쁜 아가씨 같은 멍청한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와 분노를 푸는 것이다. 아니, 사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지. 짓밟고, 총알을 몇 발 더 박아주어야 응어리가 풀렸다. 그래서 상디에게도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그게 지금까지 푸딩이 해온 일이고 그 것이 푸딩의 전문이었으니까.

 


' 빈스모크 사앙디이~? 그 멍청이 말이야? 하! 꼴에 좀 맞춰주니 헤실대는 꼴 하고는... 그 녀석과 내가 정략결혼이라니! 보스는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야? '

푸딩은 알고 있었다. 이 말을 할 때 밖에 상디가 있었고, 그 말을 듣고 있었단 사실을. 그랬기에 임무에 대한 말은 흘리지 않았다. 다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냈을 뿐. 혐오로 얼룩진 표정으로 전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상디는 듣고 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성격이 어떤지 알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상디가 피는 담배냄새가 푸딩이 있는 곳까지 흘러들어오고, 문 너머에서 결 좋은 금발이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이 곳에서 저런 냄새의 담배를 피는 것은 상디 뿐이니. 이 저택에서 저런 깨끗한 금발을 가진 이는 상디 뿐이었으니. 이건 단지 시험이었다. 갑작스러운 충동이었다. 너도 날 경멸하겠지. 그리고 푸딩을 경멸하게 된다면 푸딩에게는 한결 편한 임무가 되리라. 서로서로 멀어져서 결혼식 때만 만나게 될 것이고,,, 그리고는 탕! …상디에게 슬슬 지긋지긋함을 느낀 푸딩이 선택한 방식이었다.

푸딩의 본 성격을 알게 된 이들은 늘 푸딩을 경멸했다. 가식적으로 굴기는! 이제 너 같은건 믿지 않아! 그리고 그 이후로는 푸딩의 그 어떤 말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푸딩은 사람을 믿지 않았다. 그들이 믿어주지 않는데 어째서 푸딩도 그들을 믿어야만 하겠는가. 사실 그들의 반응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행동들이 가식이고 거짓이란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어느 누구라도 그랬을 터이니. 하지만, 상디만큼은 푸딩에게 한결같이 친절했다. 그때 듣고 본 이야기에 대해 입을 뻥긋도 하지 않았다.

' 푸딩양,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

실없는 자식… 의문은 들지 않았다. 다만 푸딩은 상디의 뒤통수에 총알을 박아주지 못한 것이 매우 안타까워, 임무를 더 난폭하고 잔인하며, 깔끔하게 처리했다. 후환도 남기지 않았다. 그 잔인한 임무 처리에도 조직의 간부들 중 일부와 상디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푸딩의 본 성격에 대해 아는 이가 없었다. 그만큼 푸딩은 철저했기에.

하지만 조직의 간부들은 전부 자신을 받아들여준 가족이었다. 즉, 그의 가족들 중 일부와 상디를 제외하고는 푸딩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다. 이제 곧 상디는 죽을 테니 푸딩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는 가족들, 심지어 가족 전체가 아닌 그 중 일부뿐이 되겠지. 늘 그랬듯이. 푸딩은 분명 상디가 자신과 같이 가식을 떠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면 지나치게 속 좋은 자식이거나…. 어느 쪽이어도 딱 질색이다. 그러나 푸딩은 분명 전자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 말을 듣고도 친절하다니. 그 정도로 속 좋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가족들도 그러하니. 자신의 가족들도 푸딩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저 가족이니까 억지로 받아들일 뿐이지 이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푸딩의 어머니마저 푸딩의 말을 쉽게 신뢰하지 못했다! 푸딩은 순식간에 상디가 더 역겨워졌다. 동족을 만난다는 것은 역겨운 일이었다. 늘.

그래서 푸딩은 굳게 다짐했다.
저 역겨운 놈을 반드시 죽이겠다. 내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놓으리라. 어떻게 해서라도.

하지만 그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상디가 푸딩에게 어느 날 갑자기 한 말 때문이었다.

' 푸딩양. '

그때는 상디와 함께 임무를 나갔었다. 상디 앞에서는 아주 귀엽고, 조신한 아가씨를 연기해야했다. 물론 그 귀엽고 조신한 아가씨를 연기하는 것도 임무를 병행하면서 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래서 평소와 같이 일처리를 하지 못했다. 간단하게 죽인다. 상디가 그렇게 하듯 총은 한번만. 한번에 급소를 맞춘 후에는 그들을 위해 묵념하고…

우웩! 푸딩은 상디의 행동이 매우 역겨웠다. 뭐 하는 자식이야 저거?! 심지어 묵념하는 동안에는 담배를 끄기까지 했다! 적의 죽음에 대체 이 세상 누가 묵념을 해준단 말인가! 왜 저리 안타까워한단 말인가! 푸딩에게는 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다고 해서 천국에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저런 성격을 가지고 잘도 사람을 죽이는구나. 푸딩은 상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튼, 그날. 상디는 푸딩에게서 등을 돌린 상태로 역겨워하는 (표정은 웃고 있었다) 푸딩에게 말했다. 매우 일상적인 어조로. 마치, 오늘 점심으로는 뭐가 좋아요? 라고 묻는 것과도 같은 투의.

' 하고 싶은 대로하세요. 제게는 굳이 숨길 필요 없어요. 다 알고 있으니까. '

아.
푸딩은 그때 알았다. 가식이 아니었다. 그건 온전히 상디의 진심이었다. 그 올곧은 눈이 푸딩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푸딩의 말에 상처를 받았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친절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푸딩을 이해해줬다. 그리고 또한 믿고 있었다. 그 말을 하면서 무방비하게 뒤 돌아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이해? 믿어? 하지만 어떻게? 왜? 왜 자신을 이해하지? 어떻게 가식이란 걸 전부 알면서도 믿고 있지? 푸딩은 이해하지 못했다. 가족들도 마지못해 받아들였을 뿐,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상디가 어떻게 푸딩을 이해한 것일까. 어떻게 믿는 것일까.

 

상디는 푸딩이 한 말을 들었다. 그래. 상처를 받기는 했다. 하지만 푸딩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먼저 들었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하고 해야 하는 것인데. 지금 푸딩이 자신과 결혼한다면 푸딩은 인생의 절반을 넘게(임무 도중에 죽지 않는다면) 그와 살아야했다. 인생의 절반도 넘는 시간을 싫어하는 사람과라니. 그렇게 끔찍한 일은 또 없을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자신이 그의 행복을 방해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성격이야 뭐. 그의 형제들(이라고도 칭하기 싫은 놈들)이 더 했으면 더 했을 것이다. 그러니 푸딩이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그에게 화를 내고 역겨워한다고 해도 상디는 괜찮은 것이었다. 그래서 상디는 푸딩을 이해했다. 그래.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그를 좋아할 수는 없고,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 중 하나가 그의 약혼자 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 네? '

푸딩이 상디의 말에 놀란 듯 반문해왔다. 씁쓸한 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담배 때문인가. 상디는 애꿎은 담배꽁초를 발끝으로 문지르며 머쓱하게 대답했다.

' 말 그대로예요. '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하고 싶은 말을 하세요. 상디는 그런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다. 푸딩이 자신에게 맞춰주는 것이 보였기에. 아무리 가식이라 하더라도 싫어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대하기 힘든 것이다. 상디는 푸딩에게 연민을 느낀 것이었다. 푸딩은 그 말에 속에서 무언가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욕지기일까? 구역질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 무엇이 됐건 푸딩은 굉장히 역겨운 기분이 들었다. 푸딩이 고개를 숙였다. 투명한 물들이 투두둑 떨어졌다. 왜? 나는 왜 우는 것일까? 상디의 상냥함에? 지난 시간 동안 자신이 해온 일들에 대한 후회에? 아니면 대체 왜? 사람의 감정이란 복잡해서, 자신이 왜 지금 어째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푸딩은 알 수 없었다. 상디는 그제서야 뒤를 돌아 푸딩을 보고 깜짝 놀라 다가왔다. 푸딩의 물기어린 흐릿한 시야로 결 좋은 금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리고 그때가 샬롯 푸딩이 사랑에 빠진 순간이었다. 아, 사랑! 참으로 3류 로맨스 소설에서도 안 쓸법한 전개성이다. 사랑에 빠진 이유가 지나치게 빈약하지 않은가! 하지만 푸딩은 스스로가 왜 사랑에 빠졌는지도 모름으로, 스스로의 사랑에 대해 무어라 할 말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빈약하고 알 수 없는 이유를 가진 사랑은 마치 달콤한 캐러멜 소스에 절여진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푸딩은 알았다. 결혼식까지는 고작 1주... 그 캐러멜 소스가, 그저 비린내 나는 피 웅덩이로 바뀔 시간도 고작 1주 남은 것이었다. 푸딩은 결심해야 했다. 
그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그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 오늘 간식은 마카롱에… "

저렇게 친절한 사람을, 죽여? 내가? 아니다. 사실 그의 상냥함은 모두 핑계다. 푸딩은 지금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그 사람들 중 상냥한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상냥함은 그저 푸딩의 핑계 중 하나였다. 푸딩이 정말로 그를 죽이고 싶지 않는 이유는…  푸딩은 상디의 말을 못 들은채 하며 손가락을 놀렸다. 늘 그랬듯이, 타닥, 타다닥. 타다다다닥. 점점 타자소리가 빨라졌다. 상디의 말이 멈췄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 자신이 상디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푸딩은 그의 목소리를 좀 더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상디의 품에 안겨서, 진짜연인이 되어…. 그러나 그것은 꿈과 허상일 뿐이지 결코 진실이 될 수 없었다. 푸딩은 그걸 알고 있었다. 보고서를 다 썼기 때문에 푸딩의 잡생각도 멈추었다. 동시에 손도 멈추었다. 상디가 준비한 마카롱을 보지도 않은 채로, 일어나서 식어버린 홍차를 한숨에 들이키고는 밖으로 나섰다. 그 마카롱도, 홍차도 느릿하게 마시고 먹는다면…

…그 온기에 잠식되어 그를 절대로 죽이지 못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쾅, 닫히는 문소리에 상디는 시들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자신을 싫어하는 걸까. 상디는 손가락을 꼼질대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사실 푸딩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혼하게 될 사람이 푸딩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닌 척하지만, 결국에는 푸딩도 친절한 사람이니까. 언젠가 그렇게 자신이 싫다면, 그냥 떨어져 지낼까요? 라고 물은 적도 있었다. 그때 푸딩은 분명,

' 뭐어?! 야, 야, 약혼자 구실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사,사,사~!상디...........씨! '

라고 했었나. 상디는 그때를 회상하고는 키득였다. 귀여운 레이디야. 정말로. 자신을 배려해 준 것이 틀림없었다. 약혼자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분명 그의 현 보스가 상디를 콕콕 찌를테니. 콕콕은 귀엽지, 푹푹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그의 전 보스였다면 그러지 않았을 터인데. …아무튼, 아무리 푸딩이 상디를 싫어한다고 해도, 상디는 푸딩을 싫어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싫어할 수 없었다. 정말로.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안 그런 척 친절하게 대해주는 데에다가, 레이디이니. 싫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정말로…. 상디는 방의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홍차를 따듯하게 다시 데우면서 창문을 열고 창가에 기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전날이 됐다.
결혼식 전날.
푸딩은 이제 정말로 결심해야 했다. 상디를 죽일 것인가? 내가 죽을 것인가. 둘 다 사는 일 따위는 없다. 존재할 수 없었다, 나는 과연 그에게 총을 쏠 수 있는가. 푸딩은 자문했다. 아니. 그럴 리가. 푸딩의 다짐은 한없이 약했다. 무력했다. 그의 이름과도 같이 물렁물렁하고, 또 연약했다. 플라스틱 스푼으로 찌르면 부드럽게 들어갈 정도로. 하지만 푸딩은 결코 이 임무를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으니까.

조직 내에서 그는 깔보이기 쉬웠다. 연약해 보이는 외모와 가녀다란 팔다리… 외관으로만 사람을 판별하는 멍청이들에게 특히 그랬다. 이 세계에서는 깔보이면 죽는다. 그러니 푸딩은 증명해야 했다. 나는 너희에게 깔보일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므로 푸딩은 임무를 늘 성공해야 했다. 최대한 잔혹하고 깔끔하게. 자신의 연약하고 깔보이기 쉬운 얼굴과 몸은 무기로 만들었다. 그는 그 모든 것들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야 했다. 그리고 만일 한 번이라도 어긋난다면 푸딩의 지위는 저 아래로 처박히겠지. 그의 보스이자 어머니인 샬롯 링링도 그를 낮추어보게 될 것이다. 그 이전의 모든 성공들을 무시하고 오직 실패 하나만을 가지고 그를 판별할 것이다. 운이 나쁘면 배신자라고 의심도 받겠지. 아무리 가족이라 하더라도 용서는 없을 것이다. 서늘한 총구가 이마에 닿고, 곧 화끈한 열기와 고통을 느끼며 죽어가겠지. 이곳은 그런 곳이다. 굳이 자신만이 아니더라도 다 같을 것이다. 그래서 이 곳은 어둡고 또 치밀하며 그 어느 곳보다도 치열하다.

그랬기에 푸딩이 상디를 죽이지 못하면 결국 푸딩은 저 아래로 처박히게 될 것이다.

푸딩은 자신의 총을 만지작거렸다. 이걸로 내일 오후 1시경에 그를 쏴야 해. 나는 그에게 총을 들이밀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그는 자문했다. 그리고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보나마나 상디일 것이다. 푸딩은 알았다. 저 밖에서 노크하는 것이 누구인지. 푸딩이 들어오라고 하자 상디가 천천히 문을 열고 웃는 낯으로 들어왔다. 아. 푸딩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생각이 번뜩 튀었다. 그래, 이렇게 한다면… 어느새 푸딩은 손에 총을 들고 있었다. 상디의 눈이 커지고 입에 물려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담배연기가 비틀거리고 총성이 세 번 울렸다. 탕, 탕, 탕! 하얀색 벽지에 이질적이고 불규칙한 붉은색 무늬가 남겨졌다. 비추어지는 붉은 석양보다도 짙은 붉은 빛의 무늬가.

 

 

-그래서… 하루 앞당겨 죽여버렸다? 

" 응. 아까 총성은 들었지? "

-제기랄, 계획이 다 어긋났잖아. 어쩔거야! 임무를 이딴 식으로 처리하다니….

" 하, 어이가 없네. 내 임무는 상디녀석의 뒤통수에 총알을 빵! 하고 놓는 거였다고. 결혼식 날 해라. 라는 건 부가적인 거였잖아?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이라고. 그놈이 역겨워서 나도 모르게 죽여버렸는데 어쩌라고? 어쨌든 임무는 완수했잖아. "

- …시끄러워, 뭘 잘했다고 그러는 거야? …

핏자국으로 얼룩덜룩해진 벽을 푸딩이 손으로 조심스레 쓸며 조소했다. 멍청한 놈들. 그의 형제들은 실로 멍청이였다. 물론 아닌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 그랬다. 그리고 푸딩은 철저했다. 한번 저지른 일은, 깔끔하게 끝낸다. 푸딩은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와야만 한다. 그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조직원들을 도구로 생각했다. 쓸모가 없으면 언제 총구가 자신을 향할지 모른다. 때문에 좀 더, 좀 더 쓸모 있는 도구가 돼야했다. 그는 살고 싶었고, 살 수 있는 길은 그 한 가지 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 마저도 불확실하지만, 푸딩은 한번 도박을 해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시체는 어쨌어?

" 하인들보고 대충 근처 산에 버리라고 했어. 산짐승들이 알아서 뜯어먹겠지. "

-그 사람들은 하인이 아니라 그저 하위 조직원들이라고 몇 번을 말해…

푸딩이 냉담한 눈을 하고 어쩌라고. 라며 대꾸하자, 전화기 너머의 사람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거냐, 계획이 얼마나 번거로워 지는지는 아냐, 성격 좀 죽여라… 등등 이미 여러 번 들어본 비슷한 잔소리들이 영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푸딩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차피 후에 보고서를 내야 하니 뭐, 잔소리야 아무래도 좋았다. 그것보다는 상디가 더 중요했다, 왜냐하면 이 이후의 일들은 모두 그에게 달려있으니.

 

 

' 푸딩양 대체 왜…? '

뻔한 전개. 뻔한 말들… 푸딩은 그런 뻔한 것들에 무감각했었다. 늘, 배신당하는 이들은 이렇게 말했지. 심지어 소설에서도, 만화에서도, 영화에서도! 대체 왜? 어째서? …그 것들은 딱히 푸딩이 알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물론, 지금까지는 그랬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온전히 푸딩은 알아야 했다. 상디의 배신감 어린 말투가 푸딩을 깊숙하게 찔러왔다. 생각해야 했다. 상디를, 그를 살려야했다. 동시에 자신도 살아야했다. 충동적인 총질이었지만 그 총을 쏘는 간격 틈에 돌아가는 생각들이 충동을 계획으로 만들어주었다. 어두운 틈새로 빛이 하나 비추어졌다. 이렇게 한다면, 당신도 나도…

탕, 탕, 탕!

깔끔한 세 발의 총성. 적당히 빗겨나간 총알, 상처를 틀어잡고 있는 상디... 푸딩은 벽에 그려진 핏자국에 인상이 구겨졌다. 머리가 쉬지 않고 빠르게 돌아간다. 이제  위조하면 되는 거다. 사람들에게 모여야 할 무대를 만들어야 했다. 주연는 상디와 푸딩. 조연은 보스를 합한 모든 조직원들. 장르는 스릴러 추리물이었다. 로맨스는 있을까? …장르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무대를 어떻게 꾸미는가, 그것이었다. 무릇, 흔한 삼류 스파이물의 클리셰로 나오는.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것처럼…. 푸딩은 서랍을 뒤져 필요한 약을 찾아내 아직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상디에게 건넸다. 평소와 같았으면 던졌겠지만, 깨져서는 안 되는 물건이기도 하고, 중요한 물건이기도 하니 직접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갑자기 푸딩이 총을 발포해서인지 눈이 동그랗게 커져 숨을 헐떡이는 상디가 가만히 푸딩을 응시했다,

' 마셔. '

상디의 동공이 흔들렸다. 푸딩은 자신의 말투가 생각보다 담담하다는 것에 놀랐다.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었구나. 심지어 죽음을 재촉하는 말을 이리도 쉽게. 어쩌면 내일 아무렇지 않게 당신에게 총을 들이밀고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습관처럼. 그렇게 살아왔으니. 그래. 그랬던 거였어.

' 이건 대체…? '

' 어차피 당신은 내일 죽을 운명이었어. 내 임무였거든. '

그 말에 상디의 눈이 커졌다. 조금 슬픈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굳게 결의한 표정. 푸딩은 상디가 오해를 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마 지금까지 해온 행동들이 그를 죽여야 해서 일부러 거리를 두기 위해 행해졌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파악하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푸딩은 굳이 정정해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정해줄 시간도 없었다. 총성을 들은 하인들이 곧 몰려올 것이었다. 정정해주다가는 들킨다.

' 그렇다면 이건 독약…? '

' 그렇다면. 안 마실 거야? '

상디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마실게. 푸딩양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내가 영광이지…. 그 말에 푸딩은 정말로, 더더욱 상디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동시에 심장이 뛰어, 진심으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 어떻게 그렇게까지 해줄 수 있어. …바보같은 사람. 이건 독약이 아닌데. 푸딩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정말로 죽이는건 아니지만, 그를 정말로 죽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이제 만날 일이 없을 거야. 죽어서도, 만날 일이 없을거야. 당신은 그 모든 이들을 추모해주었지만, 난 아니니까. 당신은 천국 같은 곳에 가고, 나는 지옥에 가겠지. 내가 내일 당신을 죽였더라도 이렇게 울었을까. 총의 열기와 독약의 잔인함의 차이는 무엇일까…. 상디는 푸딩이 울자 퍽 당황한 눈치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허겁지겁 꺼내 살살 그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 레이디가 울면, 제 마음도 울어요. '

그 말을 증명하듯, 상디의 표정은 울상이었다. 그랬기에 푸딩은 울음을 참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디가 아니라 다른 이가 했다면 느끼하다며 미간에 총을 다섯 발 정도 박아주었겠지만, 상디니까. 상디가 해도 느끼한 말이었지만, 푸딩은 상디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용서해 줄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정도는 괜찮았다. 푸딩의 표정은 여전히 울상이었다. 영원한 이별. 이것도 한 종류의 죽음이겠지. 푸딩은 울음기 가득한, 먹먹한 목소리로 상디에게 물었다.

' 우리. 그래도 약혼자였으니까. '

마지막으로 사랑한다고 해줘.
푸딩이 퍽 애절한 투로 말하자 상디는 그 말에 아까 총에 맞았을 때보다도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바보 같은 표정, 바보 같은 사람… 상디는 이내 빙긋 웃었다. 사르르 녹을 것만 같은 달콤한 미소.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지을만한 표정은 아니었다. 상디는 천천히, 그리고 상냥하게 말했다.

' 사랑해. '

그거면 됐어. 푸딩은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머뭇거리면 눈물이 다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상디가 푸딩의 손에 손수건을 쥐어주었다. 새건 아니지만. 선물이야. 푸딩양은 날 싫어했겠지만, 지금은 푸딩양에게 필요해보이고… 괜찮다면 기념으로 남겨줘. 푸딩은 그 말이 순간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고 느꼈기에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손수건을 쥐어짜듯 잡고 있을 뿐이었다. 손수건이 우아하지 못한 모양으로 구겨졌다. 상디가 병을 비우려고 하자, 푸딩이 상디의 손을 급하게 잡았다.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있다. 

상디는 깜짝 놀랐다가, 이내 헤실헤실 풀린 표정을 지었다. 좀 전의 미소와 마찬가지로 이런 상황에서 지을 표정은 아니었다. 레이디가 잡아줬다고 기뻐하는 것이겠지. 얼간이 같아. 다른 사람이 보면 웃음이 나올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푸딩도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다면 웃었겠지. 물론 비웃는 표정으로. 하지만 푸딩은 그럴 기분도 아닐뿐더러, 진지하게 할 말이 있었다. 푸딩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한 가지 나와 약속해 줘. '

' …응? '

헤실헤실 웃던 상디의 낯빛이 바뀌었다. 무슨 말을 할지 전혀 감이 안 온다는 듯 상디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는 입을 딱 다물어버린 것이, 푸딩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했다.

' 다시는… 다시는! 나와 우리 조직의 눈에 띄지 마. 무슨 의민지 알 거야, 당신은 똑똑하니까. '

상디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그런 표정이면서도 약병을 놓지 않고 있으니까. 푸딩이 상디의 손을 놓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무엇이 들었을지 모를 병을 하나 깔끔하게 비웠다. 결의에 가득찬 표정이 조금 우스웠다. 잘 가, 즐거웠어…. 상디의 몸이 곧 힘을 잃고 쓰러졌다. 자는 것과도 같은 평온한 얼굴로. 뒤로 쓰러져서인지, 상디의 얼굴을 잘 볼 수 있었다. 둔탁한 소음이 푸딩의 귀를 울렸다. 푸딩은 잠시 창백한, 마치 송장과도 같은 상디를 응시하다가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이것으로 모두 마지막이다. 나의 미련도, 당신을 향했던 짧은 사랑도….

푸딩은 이제서야 저 멀리서 달려오는 하인들의 소리를 들으며, 병을 주워 깨끗하게 씻고 다른 병에 든 액체를 얼마 남지 않은 홍차에 몇 방울 넣은 다음, 깨끗하게 씻은 병으로 옮겼다. 내용물의 양이 비슷해서 다행스럽게도 넘치지 않았다. 가득 찬 병을 서랍에 넣자마자 하인 중 한 명이 쿠당탕 소리가 날 정도로 온갖 소란을 다 피우며 푸딩의 방에 들어섰다.

' 푸딩님, 이게 대체…?! '

제가 모시는 간부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외치다가 시체를 보고 깜짝 놀라는 그 바보 같은 표정이란. 표정만 보면 이 곳이 푸딩의 방만 아니었다면 비명을 질렀을 법한 표정이었다. 푸딩은 최대한 애달프게 웃는 표정으로 빈 병을 들어보였다.

' 독약을 먹였어요. 비틀거리는 틈에 총을 탕, 탕! 하도 비틀거리는 것이 심한 바람에 좀 빗나갔지만... 임무였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다들 수고하세요. '

상냥한 미소를 짓던 푸딩은 하인 몇에게 상디를 근처 산에 버리라고 명령했다. 상디가 먹은 것은 독약이 아니었다. 그래.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임시로 가사상태에 빠지게 해준다는 약.... 정확한 명칭은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저번 임무에 필요해서 대충 ' 임시로 가사상태에 빠지게 해주는 약이 있던가? '라고 했더니 구해다 준 것이다…. 홍차에는 독약을 넣었으니 상디를 부검하지 않는 한 이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인들이 상디를 대충 들어다 나르는 것을 보며 푸딩은 조용히 축객령을 내렸다. 죄송하지만, 아무리 정략결혼이라고 해도 약혼자였던 사람을 죽여 마음의 충격이 크니 이만 나가주시겠어요? 울망거리는 표정은 덤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따라주지 않을 만큼 매정한 하인은 없었다.

 

물론, 이것도 잠깐이다. 상디는 아마 지금쯤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상디는 똑똑한 편이니 그때 자신이 했던 말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부디 상디가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켜주길 바라며, 푸딩은 침대의 등받이 쪽에 몸을 기댔다. 만일 상디가 들킨다면, 자신은 물론이요 상디도 반드시 찾아내 죽이겠지. 그래. 같이 죽는 거다. 그 것도 분명 괜찮을 것이다…. 물론 같이 죽는다고 해서 그들이 다시 만나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사후세계에 대한 확신도 없을뿐더러, 있다고 해서 상디와 푸딩이 같은 곳을 가리란 보장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리고 사실, 푸딩은 이미 상디가 들킬 것이라 반쯤 확정지은 상태였다. 그리 요란한 사람이 들키지 않을 리가 없다. 지난 시간동안 겪어봐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푸딩은, 눈물 자국이 남은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몸 속 깊은 곳 까지 담배냄새가 스며들어왔다. 늘 그 사람이 피우던 담배….
푸딩은 태어나 처음으로 망자에게 깊은 애도를 보냈다.
망자가 아닌 망자에게,
생자가 아닌 생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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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롤

@heyroll_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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