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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트랩

어둠이 서려 불안과 공포가 인간들을 좀먹고 피와 살과 뼈가 흔하게 나뒹구는 도시.
강자만이 법. 강자의 권세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암흑가.
그곳에서도 가장 깊은 어둠과 가장 낮은 존재들이 기어 다니는 가장 깊은 곳의 마굴에서 내일 없이 사는 이들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들이 있었다.


샬롯가와 제르마66.
마피아계의 대모 샬롯 링링의 구역에서도 움직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암살가 제르마66와
마피아계에서도 손꼽히는 가문인 샬롯가.

그들의 관계는 아직 어떤 이름도 붙지 못했다.
그들은 사이좋은 동맹도 아니고 대척하는 적도 아니었음으로.

샬롯가에게 제르마는 가끔 일을 쥐여주는 하청이자, 제 구역을 넘나드는 작은 벌레였고, 제르마에게 샬롯은 의뢰인이자 언제든 죽일 수 있는 표적이었다.
아군과 적군의 사이를 넘나들어 위태로운 관계 속에서도 샬롯 스무디와 빈스모크 레이주의 관계는 남달랐다.
그들의 첫 만남이 드물게도 특별했기에 더욱 그랬다.
샬롯가의 구역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어느 휴양지에서의 만남은 정말로, 운명 같은 우연이었다.
어쩌다 보니 두 사람의 휴일이 겹쳤고, 어쩌다 보니 두 사람 다 바다를 좋아했다.
한적한 바다에서 여유롭게 햇살을 만끽하는 휴가를 즐기는 걸 좋아하는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었다.
한여름의 휴양지. 선명한 햇살을 차양으로 가리고, 그 아래 그늘에서 나누었던 한잔의 달콤한 칵테일.
아득한 바다가 바라보는 그곳에서 서로가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만난 둘만의 추억은 꿀처럼 질고 달았다.

꿈결 같던 휴양지에서 벗어나 서로의 삶의 구역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두 사람 모두 그때의 추억을 잊은듯했다.


한 사람은 마피아. 한 사람은 암살자.


한 사람은 표적. 한 사람은 저격수.


다른 상황, 다른 이름, 다른 관계.


겨누어진 총구와 부딪히는 칼날에서 불꽃이 튀었다.
어둠에 녹을 듯 짙고 어두운 보라색의 셔츠가 눈먼 탄환에 스쳐 찢어졌다.
달콤한 속삭임은 매력적이었고, 빤히 보이는 속셈이 귀여웠다. 위태롭게 칼날 위를 춤추듯 걸으며 이 어둠에 어울리지 않는 고운 옷자락을 팔랑거리는 레이주가 우습게도 사랑스러웠다.
그것이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이리라 스무디는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즐거웠던 추억의 향수라거나.
깊고 달콤한 입맞춤을 남겼던 도톰한 입술이 고운 호선을 그리는 게 스무디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쉽다는 듯 입술을 매만지는 레이주의 다른 손에 들린 총의 부조화에 스무디가 으득, 이를 갈았다.
암살에 실패한 레이주를 몰아넣은 스무디는 약한 배신감에 입술을 짓씹었고, 레이주는 익숙한 체념에 은은한 미소를 그렸다.
주고받는 공방에 섞인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칼날처럼 날카롭게 상대를 향했다. 비꼬는 것은 기본이고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상대를 흩트리고 빈틈을 만들어내기 위한 모든 수를 동원함에도 둘만의 추억만은 찬란하여 스무디도 레이주도 마지막 선을 넘을 듯 넘지 못했다.

마침내. 겨누는 총 끝이 떨리고 흐트러진 호흡이 틈을 만들어 내, 마지막 기회는 언제나 그렇듯 손안에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그 후로 다음을 기약하는 일이 점점 늘어났다.
바에서, 카페에서, 길거리나 어두운 골목에서 어느 날은 레이주가, 또 어느 날은 스무디가 서로를 당기고 밀었다.
특히 레이주의 은근한 눈길과 닿을 듯 말듯 스치는 손길과 매혹적인 미소가 이루어내는 함정은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무디는 별수 없이 몇 번이고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도 상대의 끝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스무디에게는 생소한 일이었다.
빈틈을 내보이면 그저 죽을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빈틈을 보이고도 죽지 않을 수 있는 타인이라는 것은 낯설고도 신선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발등을 간지럽혀 해사하게 웃던 여자와 섬의 특산물로 만든 아주 달콤한 음료에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이면서 얼른 마셔보라 재촉하던 여자의 한여름의 햇살보다 뜨겁고 수없이 밀려오는 파도보다 애끓었던 시간이 서로가 서로의 끝을 진정으로 노릴 수 없게 했다.
그것은 집착이었다가 후회였다가 미련이기도 했고, 또 알 수 없는 것이 되어 스무디를 괴롭혔다.
어느 한쪽이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면 다른 한쪽이 굴러떨어질 것이 빤히 보여 함부로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못했다.
스무디는 탐이 나는 과실을 따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굴었다. 그 과실을 따 손에 넣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이 많았지만,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전부 그러모아 손에 쥐고 싶은 욕심이 났다.
스무디는 샬롯 링링의 딸이었고 그를 닮은 자녀들이 다 그러하듯, 탐욕스러웠다.
누구 하나 굴러떨어져야 끝날 관계란 것도 알았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사람 마음대로 되던가.
하루에도 수십번 마음이 터질 만큼 커졌다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을 잃기를 반복하는 것조차 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스무디는 한발 먼저 용기를 냈다. 전부 손에 넣기 위한 탐욕스러운 용기였다.
샬롯 스무디는 빈스모크 레이주를 손에 넣고자 했으며, 그러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생각이었다.
누구도 모르게 납치해서 구속 구를 채워두고 감금하거나, 신종 마약에 중독시켜 자신만을 바라보게 하거나, 다치게 하긴 싫지만, 전의 피투성이 모습도 좋았으니 사지의 힘줄이라도 잘라볼까…. 무슨 수를 써서든 제 것으로 만들겠다며 이런저런 방법을 늘어놓는 스무디를 카타쿠리가 짠하게 바라봤다.
그거 아니다…. 방법도 사상도 전부 틀려먹었다. 저런 게 내 동생이라니…. 하지만 귀여우니 상관없나. 가족 팔불출 카타쿠리는 그렇게 연인과 함께 허니문을 갈 거라면서 구속 구를 제작주문 넣는 동생을 너그럽게 지켜보다 상대가 그 제르마66의 암살자이니 튼튼하게 만들라며 용돈을 쥐여주었다.
그러나 막상 마음먹은 것과는 달리 가장 중요한 상대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레이주를 맞이할 준비는 다 끝났는데 가장 중요한 레이주 본인이 소리 소문도 없이 모습을 감추었다.
평소에는 하루걸러 하루는 얼굴을 보았는데, 한 달이 넘도록 옷자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무채색의 거리에서 유일하게 시선을 사로잡던 솜사탕 같은 연분홍 머리카락이 한 줌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일하러 갔는가, 어떤 놈이 감히 거사를 앞두고 내 레이주한테 일을 준거지, 어디 다친 건 아닌지, 설마 내 계획을 눈치챈 건가,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스무디의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져만 갔다.
그와 함께 폭력성도 강해졌다.

간단히 겁박만 하는 일에도 금세 눈이 돌아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피투성이로 돌아오지 않은 날이 손꼽을 정도로 스무디는 폭력성은 물론이고 스트레스 지수도 쭉쭉 올랐다.


안 그래도 무서운 마피아 가의 손아귀에 있던 구역은 평소보다 더 숨죽이고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검고, 흐리고, 어두운 거리를 걷는 피투성이 스무디를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다. 검은 정장이 붉게 보일 만큼 피에 절은 스무디는 팔랑이는 옷자락만 봐도 눈이 돌았다. 가슴의 답답하고 저린, 낯선 고통에 스무디는 몸부림쳤다. 부풀었던 마음이 푹 꺼지는 것보다 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하루하루 멀쩡한 구석이 사라지는 스무디의 방의 한쪽에는 아기자기 예쁜 선물상자만이 늘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오직 그곳만큼은 성역인 듯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받을 이 없는 선물은 하루하루 쌓여만 가고 스무디는 그저 눈물이 날 만큼 그리움에 잠겨 오늘도 침대를 부쉈다.
그런 스무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빈스모크 레이주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몇 년이 지나서였다.
샬롯가의 정보부를 닦달해 찾아 헤맸건만, 정작 상대는 생각도 못 했던 양지에서 당당히 자리를 잡고 웃고 있었다.
어두운 뒷골목에서 공포를 등에 업고 군림하는 마피아도 저 양지로는 나서지 못했다.
어둠은 빛의 앞에서 힘을 잃기 마련이라, 양지는 그들에게 신 포도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어둠의 가장 밑바닥에 들러붙어 있었을 암살자 가문이. 어떻게.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미 제르마 66에 일감 한두 개 정도 던져주었던 놈들이 어수선하게 떠들었다.
어둠에 속한 자들 중에서 빛을 향한 갈망 한 줌 없는 이들이 없는 만큼 수런거림은 점점 커지기만 했다.
스무디도 그런 양지의 빛을 갈구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에야 샬롯가의 행동대장으로 어둠에 동화되어 양지를 향한 마음을 접었지만, 저 양지에 있는 것은 그토록 탐내던 레이주였다.

스무디의 새파란 눈이 심해의 깊이만큼 가라앉았다.

스무디가 레이주를 찾아간 것은 늦은 시간이었다.
어둠에 휩쌓인 인적없는 골목길에서도 레이주는 눈에 띄었다. 마치 어둠조차 닿지 않는 듯한 거리감이 낯설었다.
어둠에 숨어 몸을 가린 스무디를 레이주는 금방 눈치챘다.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피 냄새가 스무디의 존재를 드러나게 했다.
말은 없었다. 레이주는 언제나 그렇듯 웃었고, 그 웃음은 전과 달랐다.
얇은 유리막이 한 겹 더해진 것 같은 서늘한 웃음. 다른 버러지들을 볼 때와 같은, 그런 시선.
언제고 레이주에게 특별한 사람이라는 단단한 확신이 한순간에 사그라져버렸다.
거절당하더라도 힘으로 끌어오려던 마음조차 얼어붙을 만큼 차갑게 내리긋는 그런 미소.
레이주는 어둠 속에서 한 발도 내딛지 못하는 스무디를 여상스레 지나쳐갔다. 희게 팔랑이는 옷자락을 잡을 생각도 못 한 스무디가 그대로 떠나보내는 동안, 레이주는 단 한 번도 스무디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둠에 남은 스무디는 레이주의 뒷모습조차 담지 못한 채 속절없는 절망에 무너졌다.
완벽하게 맞춰져 있던 퍼즐에 한 조각 다른 물이 든 것을 빼내었더니 전부 무너진 것처럼, 쌓아 올린 블록의 지지대를 빼낸 것처럼. 그렇게.

어제와 같이, 내일도 그러하듯.
진득한 어둠이 물러나고 산뜻한 햇살이 세상을 비추었을 때,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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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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