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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아닌 적막이 내려앉았다. 적막이 감도는 공간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우악스럽게 뜯겨 나간 소매의 끝에 아스라이 매달린 단추가 아까 의 교전을 토로했다. 붉은색 혈향이 코끝을 맴돈다. 손목을 타고 흘러내리다 이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역시 붉은색을 띄고 있었다. 아악! 누군가가 지르는 새된 비명이 귀를 찌르자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돌아가는 시야에 잡히는 찬란한 금빛. 아, 에이스가 자그마한 탄성을 내지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땅거미가 진 다음의 거리는 한산하여 눈치 보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단 장점이 있었지만 때때로 전신을 집어삼키려 드는 어둠에 발목이 잡힐 때도 있었기에 방심은 해선 안 되었다.


 “늦었네, 에이스.”


 흰 정장 위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를 묻힌 채 사보가 여상스런 인사를 건넸다. 여어, 하며 대충 인사를 받아준 에이스가 시선을 뒤로 넘겼다.
 쌓이고 쌓인 시체 더미를 보는 것은 그다지 낯선 경험도 아니었다. 고작 이런 것에 기겁하기엔 쓰레기장, 그 밑바닥부터 시작한 인생이라고 할 수 없지 않나. 그의 시선이 다시금 옮겨졌다. 사보의 손에 들린 펜치와 그에게 잡힌 이의 너덜너덜한 손끝이 방금까지의 상황을 말해주었다.


 “캐낼만한 건 있고?”
 “뭐, 그건 이 녀석이 입을 열면 알 수 있지 않겠어?”


 배경과 어울리지 않는 나직한 웃음소리가 주변 공기 사이로 퍼졌다. 뒷목을 긁적이며 쭈그려 앉은 에이스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 위로 당연하단 듯 쥐어지는 펜치가 서늘한 빛을 내었다.
 제, 발 그만…. 애원하는 목소리가 퍽 처연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했다. 수 초간 눈빛으로 의견을 교환한 결과는 어찌 보면 당연한 현실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하나 남아 있던 손톱이 무자비하게 뽑혀 나갔다. 그리고는 불결한 것 취급을 당하며 땅바닥에 버려졌다. 그 주변은 이미 붉은 매니큐어를 칠한 듯 다양한 크기의 손톱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상황, 하나 더 늘어난다 해서 티도 나지 않는다.


 “사보, 다음 일정은?”
 “없을 걸. 왜?”
 “이 새끼랑, 저기 죽은 척 하는 새끼만 끝내고 데이트라도 할래?”


 사보는 말없이 어깨만 으쓱이더니 근처에 잡히는 파이프 하나를 가지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던 이의 머리를 그대로 가격했다. 에이스의 턱 끝이 무성의하게 가리키던 쪽이었다. 낡아빠진 벽 위로 검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작게 휘파람을 불던 에이스가 나이스 샷이라고 외치려던 순간 앞을 스치는 무언가에 곧장 고개를 뒤로 물렸다. 목표를 잊은 칼이 횡을 그리며 허공을 배회했다.


 “이래야 재미있지.”


 경쾌한 웃음을 터뜨린 에이스가 손바닥 가득 상대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뒤에선 이미 묵직한 타격이 연속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에이스는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지었다. 손톱을 뽑아냈던 것의 아가리가 쩌억 벌어져 이번엔 인간의 입 속, 열을 맞춰 줄지어 있는 치아를 탐내고 있었다.


 “에이스, 할 거면 빨리 해. 데이트 가자며.”


 사보의 부름에 치아를 뽑기 쉽게 돌을 물려 턱을 으깨고 있던 에이스가 고개를 돌렸다. 사보의 발아래엔 이미 머리가 부서져 얼굴조차 구분할 수 없게 된 이가 쓰러져 있었다. 잔인하기도 하지. 뼈를 반대 방향으로 부러뜨린 탓에 살갗을 뚫고 튀어나온 흰 뼈가 피로 이루어진 웅덩이에 빠져 익사해갔다.


 “어, 금방 끝낼게.”


 우선 이것부터. 에이스가 어금니 하나를 뽑았다. 채 언어가 되지 못한 비명이 골목길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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